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메흐메드 알리 (문단 편집) === 동방 위기 === 기껏 술탄을 도와서 전쟁에 참전했더니만 전쟁에서는 져버리고 콩고물 하나 얻지 못한 메흐메트 알리는 대신 [[시리아]]라도 내놓고 자신이 맡고 있는 이집트 태수직을 자식들한테 물려줄 수 있게 세습직으로 바꿔줄 것을 요구했다. 술탄이 이를 거부하자 분노한 메흐메트 알리는 1831년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프랑스]] 장교들이 지휘하는 이집트군은 연이은 전쟁의 충격으로부터 아직 헤어나오지 못한 오스만군을 격파하고 순식간에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점령했다. 아무리 오스만 제국이 개혁이 완료되지도 않았고 예니체리가 남긴 상처가 여러곳에 남아있었다고는 하나 어처구니 없는 졸전이었다. 이집트군은 기세를 몰아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로 진격했고 오스만의 본토 격인 [[아나톨리아]] 중부의 [[콘야]]까지 진출했다. 메흐메트를 막을 수단이 없어진 마흐무트는 다급하게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했고 러시아는 이에 화답해 아나톨리아로 내려와 이집트군을 가로막았다. 여기에 러시아가 오스만을 자신들의 영향권에 집어넣어 완전히 지중해로 내려올 것을 우려한 영국과 프랑스 역시 개입해 메흐메트 알리와 마흐무트 2세에게 휴전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결국 1833년 휴전 결과 오스만은 국체를 보전하고 이집트는 형식적인 속령으로 남았으나 크레타와 시리아, 헤자즈 등을 통째로 메흐메트 알리에게 내주어야 했다. 이후 마흐무트 2세는 메흐메트 알리한테 복수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자신이 지도하는 [[탄지마트]] 개혁을 가속하여 대대적인 근대화에 돌입하였고 메흐메트 알리는 메흐메트 알리대로 아예 오스만과의 주종관계를 완전히 청산하고 이집트의 독립을 꿈꾸기 시작했다. 오스만과 이집트 사이에 다시 전쟁의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했고 휴전을 맺은지 6년 후인 1839년, 근대화가 얼추 끝났다고 생각된 마흐무트는 8만 대군으로 시리아 침공을 지시한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를 비웃기라도 한듯이 오스만군은 네지브 전투에서 4만여 명의 이집트군에게 무참하게 패배하였고 [[알렉산드리아(이집트)|알렉산드리아]]를 봉쇄하기 위해 출항했던 오스만 해군은 함대 전체가 알리에게 투항하는 바람에 마흐무트 2세는 홧병으로 지병이던 결핵이 악화되어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급사한 마흐무트의 뒤를 이어 어린 나이의 [[압뒬메지트 1세]]가 갑작스럽게 술탄 자리에 올랐고 권력의 공백을 틈타 무함마드 알리는 '''옛 [[맘루크 왕조|이집트-시리아 왕국]]을 재건하여 독립하는 것을 넘어서서 아예 코스탄티니예까지 정복하여 오스만의 뒤를 이은 새로운 이슬람 제국을 세우겠다'''는 야망을 품기 시작했다. 하지만 19세기 세계 최강대국 영국의 입장에서 오스만은 러시아가 [[그레이트 게임|지중해로 내려오는 것을 막는 방파제]]로서의 가치가 있었다. 그런 오스만이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이집트에 의해 완전히 와해되어 힘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영국은 오스만의 편을 들어 개입하였으며 오스만과 동맹 관계이던 러시아, 그리고 또다른 열강인 [[오스트리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까지 이 사태에 개입해 메흐메트 알리에게 시리아 영유를 조건으로 이쯤에서 그만두라고 요구했으나 프랑스라는 뒷배를 두어 자신만만하던 메흐메트 알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영국이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여 이집트와 시리아 해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열강 연합군에 의해 이집트군이 크게 패하자 결국 메흐메트 알리는 열강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여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의 형식적인 속령으로 남으며 크레타와 시리아, 헤자즈를 반환하고 군대 규모를 축소한다. 그러나 처음 전쟁의 목표였던 이집트 태수직의 세습이라는 목표는 달성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이집트는 여전히 형식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속령이긴 하지만 사실상 오스만 제국에서 분리독립하게 된다. 메흐메트 알리와 그의 후손들은 1956년까지 이집트를 다스리게 되었으며 이집트의 왕은 아니고 태수(Khediv)라는 칭호를 사용했지만 사실상 한 나라의 독립군주나 다름없었다.[* 이집트가 술탄을 칭하게 된 건 오스만이 완전히 재기불능 상태가 된 1915년, 왕을 칭하게 된 건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1922년이었다.] 다만 이집트는 이후로도 여전히 오스만에게 정기적으로 세금을 납부했으며, 1860년대까지 오스만 제국 전 속령중 가장 세입이 높은 지역이 남동유럽 다음으로 바로 이집트였다. 이집트는 영국의 보호령으로 전락한 1880년대에 세금 납부를 중단하였으며 이는 오스만의 세수를 감소시켜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1848년 장남 이브라힘 파샤에게 태수 자리를 양위했으나 이브라힘 파샤가 결핵에 걸려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고 차남 투순 파샤의 아들인 손자 압바스 파샤에게 태수 자리가 돌아갔다. 1849년 8월 2일 알렉산드리아에서 사망하여 시신은 [[카이로]]의 무함마드 알리 모스크에 안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